제 목 : AD와 BC!(3) | 조회수 : 1497 |
작성자 : 이애실 사모 | 작성일 : 2008-09-17 |
예수님은 ‘내가 곧 하나님’이라는 자증적 설교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. 이 설교를 듣고 나서 민중들은 파가 둘로 갈라졌습니다.“저 예수, 귀신들려 갖고 미쳐서 저런 말 하는 건데 뭣 땜에 저 설교를 듣고 앉아있냐?”하고 단칼에 결정 내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,“아니야, 아무리 들어봐도 이건 절대로 귀신들려 갖고는 할 수 없는 설교야. 귀신들린 사람 한두 번 봤냐?뭔가 다르잖아? 또, 귀신이 소경 눈뜨게 하는 거 본 적 있냐? 그러니까 하여튼 아무래도 좀 생각해 봐야겠어!”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(요10:20-21).이것이 예수님을 만났고, 그 설교를 들었고, 이적을 구경했던 당시 보통사람들의 갈등이었습니다.
우리도 그런 갈등을 찾아내 봅시다. 성경을 읽으면서 갈등해야 합니다. 목숨을 걸고 갈등해야 합니다. 왠지 아십니까? 바로 그 ‘예수’가 자기 이름으로 내 건 것이 ‘영생’이기 때문입니다. 만약 ‘부자되는 것’, ‘건강하게 되는 것’, ‘애들 잘 되는 것’정도를 내걸었다면 그 갈등 안해도 됩니다. 궁극적인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.
그런데 그 예수는“영원한 생명”에 당신 이름을 걸고 있습니다. 그게 바로 문제라 이말입니다. 고기 많이 잡히는 것,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것,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는 것,자식 문제, 건강, 그런 단계들을 통과해서 인간 최 종국의 딜레마인 ‘영생’이라는 개념까지 관심의 대상을 옮겨갔던 베드로, 요한, 마리아, 예수님의 동생들 이야기도 바로 이 관점에서 다시 재조명해 보며 읽어야 합니다. 그렇습니다. 예수의 제자들도 그게 문제였습니다. 만만하게 선생 예수를 “하나님”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는가?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.예수의 제자들 한 사람,한 사람,다 피눈물 나는 고민을 하며‘예수, 그가 누구인가?’라는 명제를 풀어나갔습니다.
멀쩡한 정신에 누구 한 사람인들 그게 쉽겠습니까?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.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을 다 믿음 좋은 사람으로 아예 찍어놓고 출발하면 안됩니다.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말만 듣고는 예수의 부활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했던 도마의 경우를 보면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그걸 깨닫습니다.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는 동료들의 말을 절대로 믿지 않았습니다. 멀쩡한 정신(?)을 가진 우리와 똑같은 모습입니다.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눈 앞에 나타나십니다. 결국 도마는 막다른 골목에서 덜미 잡힌 사람처럼 그만 ‘헉’하고 내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. “나의 주, 나의 하나님이십니다(요20:28)”라고. 더 이상은 예수를 어느 딴 존재라고는 말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.
누구보다도 고민되었던 사람은 예수의 동생들이었습니다. 한 집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난 형이었습니다. 어느 날 30세쯤 되었을 때부터 선지자로 나섰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 형 보고 미쳤다는 겁니다.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행세를 한다는 겁니다.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되어 갖고 그럴 수 있느냐는 겁니다. 좀 말리라는 겁니다. 이미 집에서 나간 지 오래 된 형 예수를 만나려고 드디어 동생들은 집회장소를 찾아가기도 합니다(마12:46).유명해지려면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왜 갈릴리에서 못 떠나냐고 빈정대기도 했습니다. 그러던 동생들이었습니다. 고민 많이 되지요. 형인데.....
어?성경이 읽어지네/이 애실 사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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